인 다이얼로그(In Dialog)는 세계미술과 한국미술의 미술사적 맥락을 연결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 프로젝트로 한국의 단색조 추상 회화를 대표하는 정상화의 작품과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 사이의 대화를 기대한다.
정상화의 ‘백색추상’에는 오랜 시간 한국, 일본, 프랑스를 넘나들며 현대미술의 최전선을 경험한 작가의 작업세계가 집약적으로 농축 되어 있다. 수행성이 강조된 정상화의 기하학적 회화와 시적 감수성의 아그네스 마틴 회화의 미학적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이 전시에서는 가장 절제된 백색추상 대표작을 선별하여 소개한다.
느린 속도로 작품을 감상하면 화면 위 서로 연결된 작은 사각의 경계에서 들고나는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고요하고 차분하며 정적이고 명상적인 색의 변주 앞에서 감상자의 시선은 깊이 빠져든다. 이러한 몰입의 경험은 정상화가 취하고 있는 고유하고 독특한 회화 기법과 무관하지 않다. 매지 않은 캔버스에 순백의 고령토를 덮어 바른다. 꾸덕꾸덕해진 캔버스를 가로세로 주름잡듯 접고 꺾어 금이 가면 뜯어내고 그 자리를 아크릴 물감으로 메운다. 바르고 말리고 꺾고 접고 뜯고 메우는 과정이 반복의 반복을 거치면서 정상화 고유의 평면이 드러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성된 정상화의 작품은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만들어진 그림이다. 작업은 작가의 치밀한 계획에서 시작되지만 마치 스스로 형태를 찾아가듯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완벽한 조화, 완벽한 균형, 완벽한 형태에 이르면 작가의 손은 멈추고 작품은 완성된다.
정상화는 자신의 창작행위를 ‘일’이라 칭한다. 창작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태도가 엿보인다.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리고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서도 덧붙이거나 채우기보다 덜어내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평면에서 평면을 찾아들어갈 뿐 읽어야 할 의미나 특정한 내러티브를 담지 않는다. 드러내고 메우는 과정의 숱한 반복을 통해 평면 속에 깃들어 있는 무한대의 평면을 밝힌다. 그만큼 작업의 과정과 작업 중 이루어지는 행위가 결정적이다. 하나의 색 안에 녹아 있는 뉘앙스를 달리하는 무수한 색 그리고 시각적 촉각을 유발하는 미묘한 결의 움직임은 ‘하나의 전체’로 경험된다.
정상화
(Chung Sang-hwa, 鄭相和, 1932~)
1932년 경상북도 영덕에서 출생한 정상화는 중학교 재학 시절 우연한 계기로 미술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서울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하였고, 1957년 인천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화가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이어갔다. 현대미술가협회와 악튀엘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정상화는 기존 회화의 틀과 형식을 과감하게 깨뜨리며 앵포르멜 경향의 미술 실험에 몰두했다. 1967년에는 파리에서 체류하며 구미 현대미술의 최신 경향을 체득한 후, 1969년 일본으로 떠나 1977년까지 고베에 머물며 활동했다. 이 시기 정상화는 일본의 급진적인 미술가 그룹 ‘구타이’(具體)의 리더 요시하라 지로와 친밀한 교류를 이어가기도 했다. 일본 활동 시기 정상화의 작품은 에너지 넘치는 앵포르멜에서 단색조의 추상회화로 점진적인 화풍 변화가 일어난다. 1973년 이후부터는 유기적인 형태가 사라지고 화면이 격자로 나누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파리와 일본에서도 활동하며 국내외에서 작품 활동을 펼쳤고, 1992년 귀국하여 활발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